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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inside MIDDLE EAST/이슬람 문화

by RyanDaddy 2021. 10. 15.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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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시아파, 누가 누군지는 몰라도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다들 아실 듯합니다. 이라크와 레바논을 이야기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를 자주 언급했었는데, 중동에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을 더 이어가기에 앞서, 오늘은 이슬람의 양대 종파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합니다.

 

※ 원어 발음으로는 순니와 쉬아에 더 가깝지만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니와 시아로 표기하였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무슨 차이?

수니파와 시아파는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리더 "칼리프"의 자격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되었고, 이제는 칼리프 제도가 없어졌음에도 오랜 시간 정치적인 대립을 계속하면서 종교적 사상까지 달라진 이슬람의 분파입니다.

 

수니파는 선출을 통해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고집합니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자격에 대한 견해 차이는 정치적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였던 시아파는 음지에서 탄압받는 동안 종교적 사상까지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무함마드의 대가 끊긴 상황에서도 그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기독교의 "부활과 구원"을 양념으로 넣어 예언자가 "재림하여 구원"한다는 개념을 넣은 것이 한 예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 교리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런 재미없는 교리차이로 싸우는 것은 아니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지역별 분포

수니파는 19억 무슬림 중 83%, 시아파는 나머지 17%에 해당합니다. 후술 할 분열 과정에서 시아파는 주로 이란과 그 주변부에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아래 지도의 노란색) 아래에서는 사우디의 와하비즘을 수니파와 다른 것으로 구분하였는데 큰 범주에서 시아파가 아닌 것은 모두 수니파로 보면 됩니다.

 

주요 시아파 국가로는 인구 절대다수가 시아파인 이란, 인구 61%가 시아파인 이라크, 레바논은 인구의 약 1/3이 시아파인 것으로 추산되며, 시리아는 시아파가 13%에 불과하나 집권세력이 모두 시아파이고, 예멘 인구의 35%도 시아파입니다. 위 나라들 중 인구 절대다수가 시아파인 이란을 빼고 모두 내전을 겪었거나 지금도 전쟁 중이니 이 둘이서 얼마나 앙숙인지 아시겠지요?

 

수니파와 시아파는 왜 앙숙이 되었나?

최고 지도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 29년 동안 총 4명의 칼리프가 선출되었습니다. 이 중 4대 칼리프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으로 그와 혈연적으로 가깝고 능력도 매우 뛰어나 일부 사람들은 알리를 유달리 추종했습니다. 알리는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했는데, 그의 사후 라이벌인 '무아위야'가 전통을 깨고 무력으로 칼리프에 등극한 뒤 자식 '야지드'에게 직위를 세습(우마이야 왕조)하려 들었습니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여기에 반기를 들어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을 칼리파로 추대하여 반란을 준비했는데, 이 첩보를 입수한 "야지드"는 군대를 보내 후세인을 살해했습니다. 이렇게 예언자의 혈육을 살해하고 세워진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성이 부족해 창건 직후부터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립니다.

 

한 세기쯤 지나 훗날 압바스 가문에서 이라크를 기반으로 왕조를 창건하고 우마이야조를 정복하였는데 이게 바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압바스 왕조입니다. 알리의 추종세력들은 이 반란에 많은 힘을 보탰지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습니다. 살아남은 알리의 후손이 없어 그들을 대표할 '칼리프'를 내세울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압바스조를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압바스조는 칼리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아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다시 시아파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한 세기만에 반란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반란군으로 불리며 쫓기게 된 이 비운의 "알리의 추종자들", 추종자라는 뜻의 단어 '쉬아'에서 유래하여 시아파로 불리게 됩니다. 

 

시아파의 저항은 알리의 아들들이 살해당한 것을 "순교"로 인식하고 처절한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광활한 이슬람 제국 영토 곳곳에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쳤고, 특히 우마이야 왕조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품은 페르시아계 개종 무슬림들이 여기에 대거 가담하면서 시아파의 중심이 옛 페르시아의 영역으로 서서히 이동합니다. 그래서 이란이 오늘날 시아파 종주국이 된 것이죠. 

 

외세에 의해 악용된  종파 갈등

몽고의 침략 당시 압바스조 칼리파는 살해당했고, 이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칼리파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왜 그럴까요?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광활한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여러 갈래로 쪼개져 "명목상의 독립"을 획득하고 "사실상 승전국들의 보호령"이 됩니다. 영국의 외무장관이던 윈스턴 처질은 앞으로 석유자원을 장악하는 것이 세계의 패권을 좌우한다고 예견하여 미래를 정확히 내다봤습니다. 중동에 파견된 영국의 첩보장교 토마스 로렌스는 아랍 토착민들의 종파 갈등과 부족주의를 이용하면 적어도 100년 이상 분열된 채 손쉬운 먹잇감이 될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렇게 승전국들에 의해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지에서 갑자기 한 나라로 묶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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