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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슬람 역사의 첫 내전, "릿다 전쟁"

inside MIDDLE EAST/이슬람 문화

by RyanDaddy 2021. 9. 29.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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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슬람사를 보면 내전이 끊이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얼마 전 정치·경제 동향 카테고리에 포스팅한 이라크도 불과 4년 전까지 ISIS와 내전을 겪었고, 이전에 포스팅한 레바논도 80년대에 내전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와 리비아는 2011년 아랍 스프링 부터 지금까지 내전이 진행 중입니다.

 

과거를 보더라도 이슬람 왕조들의 수명은 매우 짧은데, 이슬람 초기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년)는 불과 29년으로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 1세가 일으킨 반란으로 멸망했고, 첫 세습왕조인 우마이야조(661-750년)는 89년 만에 아루 알 압바스에게 멸망, 압바스조(749-1258년)는 비교적 오래간 것 같지만 셀주크 투르크(1037-1194)가 쳐들어와 꼭두각시 칼리파가 되어버리기 전까지로 끊으면 288년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중동의 척박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각 거점의 토호들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자라나기 용이한 환경도 있고, 아랍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부족주의가 국가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배경도 잦은 분쟁과 내전에 한몫하고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은 가끔 답변 활동을 하고 있는 네이버 지식iN에서 오랜만에 굉장히 구체적인 역사 질문을 만나 해당 주제로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포스팅해 볼까 합니다. 바로 1400년의 이슬람사에 등장한 첫 내전, '릿다 전쟁'입니다. 

 

릿다 전쟁이란?

'릿다 전쟁'은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뒤, 아라비아반도의 주요 부족들이 이슬람 움마(공동체, 국가)에 대항해 일으킨 내전입니다. 전쟁은 약 1년 동안 지속되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진영이 승리하였습니다. 이는 아라비아 반도를 재통 일하고 느슨했던 국가의 개념을 강화하여 이슬람 움마가 대 제국으로 팽창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내전의 원인

아라비아반도의 모든 부족들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파하는 '이슬람'이라는 신흥 종교에 탄복하여 진심으로 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갑툭튀' 종교의 사상이 어쨌든간에 무함마드가 거느린 압도적인 군사력에 '잠깐' 굴복한 것이었고, 그들의 복속을 무함마드에 대한 계약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함과 동시에 이슬람 움마에 대한 복속을 무효화하고 이슬람 이전의 각자 도생하는 체제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의 경제는 이곳을 지나는 여러 종교의 순례객의 유동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슬람은 유일신만을 인정하고 우상 숭배를 금지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아직 동화되지 않은 지배 세력에게는 그들의 경제와 권력 기반을 뒤흔드는 리스크였던 것이죠.

 

전쟁의 서막

632년 5월, 병약해진 예언자 무함마드는 629년 '무타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명령했지만, 한 달 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습니다. 개국 공신이자 그의 충실한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는 제1대 칼리파(예언자의 대리인)가 되어 이슬람 움마의 리더가 되었는데요. 그는 칼리파 등극 첫째 날, 예언자가 못 다한 비잔틴 정벌 과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정은 사실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상술한 이유로 무함마드가 죽자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배교와 반란의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죠. 원정군 사령관이 오사마가 휘하의 장군을 보내 출정 명령 철회를 요청 할 정도로 상황은 절박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진격을 재차 독려했습니다. 

가서 칼리파께 일단은 출병을 미루고 메디나를 지키자고 허락을 구해라.
우리 공동체의 모든 부족장들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
지금 우리가 모두 떠나면 불신자들이 메디나를 갈가리 찢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632년 6월, 오사마의 원정군은 출병 직후부터 아라비아 반도 북부 부족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딛혔지만 지금도 요르단 남부 사람들은 좀 호전적인 것 같.. 차근차근 이들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개

무함마드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부족들이 이슬람에 대한 복속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움마의 수도 메디나는 원정군이 출병한지 불과 2주도 되지 않아 7월 초순에 세 부족이 연합한 반란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632년 7월 말이 되자 스스로 신의 사자라 칭한 '툴라이하'도 반란을 일으켰지요. 

 

아부 바크르는 반란군의 병력 이동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고,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 할 수 있는 예언자 무함마드 가문에서 가능한 많은 병력을 차출하여 메디나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 소집된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예언자의 사촌 동생인 '알리'(훗날 4대 칼리파)를 비롯해 믿을 만한 무장들에게 이 세명 나중에 다 출세 함 지휘를 맡기고 오히려 반란군 주둔지에 대한 선제 공격을 명령합니다.

 

악조건 속에서의 첫 승리

정예병력과 전투낙타들이 모두 원정에 차출되어 급조된 군대로 병약한 낙타를 타고 싸웠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투지 만큼은 대단했나봅니다. 이들은 메디나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그 병든 낙타로 메디나 북동쪽의 반란군 주둔지까지 쳐들어가 반란군을 대파했는데, 아라비아 북부로 떠났던 원정군이 돌아오기 3일 전이었습니다. 

 

 

신속히 아라비아 북부를 평정한 오사마는 강행군을 거듭하여 8월 4일에 메디나로 돌아왔습니다. 7~8월 아라비아 북부는 기온은 40도를 가뿐히 넘고, 습도는 10%가 안됩니다. 보통은 이렇게 다니면 탈수로 죽어요. 아부 바크르는 지친 원정군을 무리하게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휴식과 보급을 명령했습니다. 첫 승리로 이제는 히자즈의 중소 부족들이 반군 토벌에 협조하기 시작했거든요. 아부 바크르는 8월 둘째주까지 신규 소집 된 병력들로만 반란군 무리의 거점들을 쓸고다니며 메디나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 아부 바크르의 탁월한 전략

8월 넷째 주, 아부 바크르는 3주 간 충분한 휴식을 취한 정예병을 재편하여 방어에서 벗어나 공세에 돌입합니다. 아까도 공세였던 것 같은데 도처에서 각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이들이 연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각개 격파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토벌군을 11개 군단으로 재편하였는데, 무패의 명장 '칼리드 빈 알 왈리드'에게 최정예 군단을 주어 가장 강력한 반군 수괴인 '툴라이하'를 추격하여 섬멸하도록 하고, 나머지 10개 군단은 각각 맡은 비교적 덜 위험한 반란 부족들을 신속히 제압하는 대로 칼리드의 본대에 합류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토벌군 출병에 앞서 모든 반란 부족들에게 각각 사절을 보내 항복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는데 이 또한 그의 지략이었습니다. 그는 반군 집단 내 구심점이 없어 이들의 연합이 느슨하다는 약점을 정확히 궤뚫고 있었습니다. 항복을 권하는 사절이 오고 가는 동안 그는 반군 부족 원로들을 접촉하여 전투 개시 직전에 반군 전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강력했던 반군 수괴인 툴라이하의 동맹 세력들 중 '타이' 부족은 반란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고, 부족장 '아디 이븐 하팀'은 독실한 무슬림이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그를 통해 타이 부족 원로들을 접촉하여 전투 개시 직전에 적의 기병 500을 투항시켰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칼리드의 토벌군은 '반니 자딜라'와의 싸움에서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보병 1천의 투항을 받아들였습니다. 632년 9월, 싸울 수록 병력이 늘어난 칼리드의 토벌군은 가장 강력했던 반란 수괴 '툴라이하'를 대파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중소 부족들은 토벌군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항복했습니다. 칼리드는 메디나로부터 동쪽으로 진격하여 10월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남북의 반군이 서로 연계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사실상 승기를 잡았습니다.

 

이슬람 움마는 승리 할 수 밖에 없었다

633년 3월, 아라비아 반도는 칼리파의 중앙 권력아래 다시 재통일 됩니다. 아부 바크르 집권 첫날 시작 된, 그의 치세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정치·군사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지요. 이슬람 움마는 이제 견고한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제국으로 팽창하는 기반을 닦았고, 토벌군을 이끌던 칼리드는 불과 3년 뒤 야르묵(오늘날 요르단 북부) 평원에서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를 패퇴시킵니다.

 

이 승리의 주역은 물론 1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탁월한 전략, 이 전략을 전장에서 정확히 실행한 뛰어난 무장들이지만, 사실 이 전쟁은 이슬람 움마가 이길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반군 패배의 원인을 아래 세 가지로 압축하면서 포스팅을 마칩니다.

 

 

1. 반란 세력들의 느슨한 연합

주요 반란 세력으로는 아라비아 중부의 '무사일리마', 남부 출신의 '툴라이하', 예멘 출신의 '알 아수와드'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목표는 이슬람 자체를 분쇄하여 이전의 각자 도생 체제로의 회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누군가를 차기 칼리파로 추대하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단 각자 이슬람 움마에서 이탈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반란세력들은 제대로 연합군을 구성하지 못했고 이슬람 움마에 각개격파를 당했습니다.

2. 방관하는 중소 부족들

이슬람 움마가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큰 부족들이 들고일어난 것이지, 중소 부족들도 반란에 가담할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당장 무함마드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깨지도 않았지만 반군 토벌에 손을 보태지도 않은 채 일단은 형세를 관망하면서 이기는 쪽에 붙으려는 심산이었죠. 그래서 반란 초기에 수적 열세에도 먼저 출병하여 기세를 잡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첫 승리를 거두면 중소 부족들이 그쪽으로 합류하여 군세를 팽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반란 세력들보다는 목표가 '아라비아 재통일'로 분명한 이슬람 움마가 훨씬 유리했지요.

3. 이슬람 움마의 압도적인 군사력

칼리파 '아부 바크르'는 경쟁자 '알리'와 힘을 합쳐 탁월한 지도력으로 움마를 이끌었고, '알라의 검'으로 불리는 명장 '칼리드 빈 알 왈리드'는 뛰어난 무공과 지략으로 반란군을 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반군이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타도하고자 하는 '이슬람'의 부재였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통일된 아라비아. 이제 전투의 규모가 과거의 수백 명 단위 부족 간 다툼과는 차원이 달라졌는데, 병력 동원 규모가 커져 부족 단위를 넘어서면 혈연의 한계를 넘어 모든 병사를 하나로 결집시킬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아직 부족 사회에 머무르던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이 바로 그런 이념이었고, 그렇게 결집 된 쪽은 반군이 아닌 '이슬람 움마'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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