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0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inside MIDDLE EAST/이슬람 문화

by RyanDaddy 2021. 5. 25. 06:00

본문

728x90
반응형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한국인 대부분은 '이슬람' 하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슬람의 호전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는 중세 유럽인들이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급격히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낸 말일뿐 사실과는 다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은 중동 레반트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로 유일신 사상 등 상당수의 교리를 공유합니다. 구약 성서가 유대인 관점에서 쓰인 역사서이기 때문에 유사한 내용이 꾸란(코란)에도 등장하지요. 무슬림에게도 이슬람의 전파는 종교적 사명입니다. 하지만 '폭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꾸란에서 발견 할 수 없습니다. 되려 꾸란에는 "종교에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지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이라는 말은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인들이 이슬람 군대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는 설이 일반적인데, 그만큼 중세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은 유럽인들에게 위기의식을 형성했습니다. 무슬림들을 놔두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키고 유럽으로 넘어와 중세 교회가 그러했듯 아마 무슬림들도 자신들을 이교도로 몰아 학살할 것이라는 공포감이었을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이 배포한 선전물들

우리는 이렇게 전쟁 중 적대국에 의해 왜곡된 이슬람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무지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변에서 이슬람을 접할 기회가 없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수출액의 10%와 수입액의 25% 정도를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문화권에 의지하고 있는걸 아시나요? 그럼에도 1000년 전의 전쟁 선전물로 왜곡 된 배타적 입장을 고수해도 될까요?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 비결

'개종하지 않으면 죽였을 것'이라는 발상은 초기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을 '종교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공인한 이래 로마가 지배한 영역과 이를 계승한 유럽의 모든 인구에게 점차 종교의 선택지는 기독교 하나밖에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 세력이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지중해에 인접한 땅 절반 이상을 정복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개종해 버렸지요.

 

시대적 배경

6세기 말 중동은 비잔틴과 페르시아가 격돌하는 접점에 놓여있었습니다. 두 제국이 300년 동안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갈구했지요. 이런 시대적 절망으로부터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흔한 일입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자신을 미륵이라고.. 무함마드는 레반트 지역에서 오랜 사상적 기반을 가진 유일신 사상을 다시 한번 설파하면서 혼란스러웠던 당시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한 초기의 무슬림 공동체는 국가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의 모든 제도와 규율의 답을 종교에서 찾았어요. 이 과정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신정일치의 이슬람 국가가 형태를 갖춰갔지요.

 

강력한 아랍 유목기병들은 아라비아 북쪽의 비옥한 레반트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더 비옥한 동쪽과 서쪽으로 거의 동시에 뻗어나갔지요. 무슬림 군대의 전투력도 강했지만 비잔틴과 페르시아가 약화되어 이 일대에 세력 공백이 있었던 점, 더욱이 새로운 질서를 갈구하던 피정복지의 징집병들이 무슬림 군대를 상대로 전멸을 각오하고 결사 항전할 동기도 없었겠지요. 그렇게 아랍 무슬림들은 순식간에 페르시아를 멸망시켜버리고 비잔틴 영토의 대부분을 정복합니다.

 

토착 종교와 기존 사회 구조에 대한 포용 정책

하지만 정복 후 통치가 지속되지 않으면 그저 전란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폭정이 이어지고 황폐화 된 삶이 계속되면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정복자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막대한 국력을 쓸 수밖에 없으며, 이런 전쟁이 지속되면 토착민들은 반이슬람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군대는 정복지의 토착 주민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제법 원만하게 통치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 제국의 합리적 조세제도를 들여다 보면, 정복자들은 이슬람 제국의 신분을 아래의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이들 중 노예를 제외한 모든 자유민에게는 납세의 의무가 있었는데 7세기에 무려 소득에 따라 세율을 차등 적용했습니다.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므로 1과 2는 똑같은 세율로 '자카트(재산의 2.5%)'를 냈고 3번의 개종을 거부한 비아랍-비무슬림들은 인두세로 알려진 '지즈야(성인 1명당 과세)'를 냈습니다. 

  1. 아랍-무슬림
  2. 개종한 피정복민(비아랍-무슬림)
  3. 개종을 거부한 피정복민(대부분 정복지의 비아랍-비무슬림, '딤미'라고 함)
  4. 노예

기본적으로 모든 계급이 국가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종교의 자유를 누렸습니다만, 이 조세 제도에는 개종에 대한 일종의 '인센티브'가 숨어있었습니다. 자카트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층에게는 아주 유리한 세율이었거든요. 세금이 이렇게 무서워요

 

여기서 잠깐 이전의 조세 제도를 겉만 훑어보면, 중세는 유럽이나 어디나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은 주로 토지세였습니다. 소수의 지배 계층은 토지를 독점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대신 하층민에게는 토지를 임대하여 토지세보다 훨씬 높은 임대료를 받았죠. 그 차액이 이익금이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가끔 이웃을 털어먹기도.. 그런데 이슬람 군대가 들어오더니 이 조세 제도를 획기적이고 합리적으로 뜯어고쳤습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개종을 거부한 피정복민들은 '지즈야(=인두세)'를 냈는데 세율이 소득 분위에 따라 성인 1명당 부자는 48 디르함, 중산층은 24 디르함, 저소득층은 12 디르함으로 나뉘었습니다. 당시의 1 디르함은 평균적인 가족의 1일 생활비 정도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당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홍길동 씨를 예로 들어봅시다. 가족 중 성인은 부부 둘 뿐이고  어린아이가 둘 있는 4인 가족이라 칩시다. 그럼 세금은 24 디르함(=24일어치 생활비)이고 이슬람력은 355일이니 대략 연 소득의 7%를 세금으로 내게 됩니다.

 

그런데  홍길동 씨가 개종하여 무슬림이 되면 '지즈야' 대신 '자카트' 납세를 하게 되는데, 독특하게도 자카트는 소득이 아닌 여유 재산의 2.5%를 납부하는 식이라서 여윳돈이 없으면 과세 자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서민층에게는 사실상 면세나 다름 없었지요.

 

실제로 많은 피정복민들이 이슬람으로 앞다투어 개종했습니다. 이후 우마이야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높은 세율을 부담하던 '딤미'들이 대부분 개종해버려 국가 재정이 파탄날 지경이었습니다. 훗날 이슬람 제국 정부는 대량 개종을 막아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 개종 금지 백서를 발효해 피정복민에게 개종 대신 공납을 요구했습니다. 

 

 

활발한 교역 활동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를 이슬람 국가라고 정의하고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초록색 부분이 이슬람 세계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제일 오른쪽에 치우친 섬들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입니다. 여기는 이슬람이 단 한 번도 침공한 적이 없지만, 이슬람 제국의 교역루트가 관통하면서 현지인과의 접촉으로 자연스럽게 이슬람화 된 곳입니다. 

 

이곳은 이슬람이 창시된 지 700년이나 지나 14세기 무렵에 아랍 상인들에 의해 소개되고, 현지인에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압바스조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 제국은 전 세계의 해상과 육상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한 입지, 뛰어난 항해술과 내비게이션을(사막에서 하루 다섯 번 베카 방향을 찾다 보니 천문학, 항해술이 발달) 바탕으로 무역에 적극 뛰어들어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중세 이슬람 제국의 교역로


아랍의 은화 '디르함'이 아프리카/유럽/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통용되어, 북유럽에서까지 환전 없이 사용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날의 USD와 같은 위상이죠?

 

중세 유럽에 유통 된 이슬람 제국의 화폐

부유한 아랍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소개되기 이전까지 당시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에는 중국과 인도의 영향으로 불교와 힌두교가 주류였습니다. 유일신 사상에 기반한 이슬람과는 사상 체계가 많이 달랐지요. 

 

배를 타고 온 세계 최고 부자나라 사람들이 술도 마시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하루 다섯 번 서쪽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당시 현지인에게 종교라는 건 옛날 이야기로 전해오는 신화이자 생활 풍습의 일부분 혹은 기복 신앙 수준에 머물렀던 반면, 이슬람은 개인 생활의 모든 영역은 물론 국가의 통치 이념이자 헌법 그 자체였습니다. 

 

 

맺음말

우리에게는 낯선 역사지만 이슬람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부터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종교와 문화적 유산을 남겼고, 1천 년의 대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 문명 성숙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것도 이슬람 제국의 천문학이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적 성취는 훗날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져 유럽의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고, 조금 비약하자면 결국 산업혁명과 민주주의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슬람 역사에 항상 아랍인이 주인공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슬람 제국을 마지막으로 계승한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 민족이 세운 나라였죠.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일대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럽 열강은 민족이나 종교·종파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국 이익만을 고려하여 인위적인 국경선을 그렸습니다. 이런 조치가 미래에 중동을 분쟁이 끊이지 않는 화약고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닙니다. 

 

"아랍 반란은 우리의 당면 목표와 부합하고 이슬람 블록의 붕괴와 오스만 제국의 패배와 붕괴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익 임. 오스만 제국을 여러 아랍국가들로 분할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 적당히 다루어진다면 아랍인들은 정치적 분열 상태, 서로 분쟁하는 매우 작은 모자이크 공국들의 집합체로 남을 것." 

1916년 1월 영국 접보장교 토머스 로렌스의 메모

 

왜곡된 가짜 정보나 배타적이고 편협한 논리로 시야를 가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포스팅을 마칩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